12월의 역사인물 오백령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는 광해군을, 이괄의 난 때는 인조를 호종하여 공주에 왔던 인물입니다.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덕구(德耉), 호는 묵재(默齋)로 2021년 12월 공주시 역사인물인 오시수 선생의 증조이기도 합니다.
선생은 선조 21년(1588) 29세의 나이로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였고 선조 27년(1594)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의 한림으로 뽑혀 사관이 되었습니다. 이어 사간원, 사헌부, 성균관, 홍문관, 의정부 등 중앙관서의 요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동부승지에 임명되어 당상관이 되었으나, 인목대비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정청(庭廳)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파직되었습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형조참판으로 다시 등용되었고 이후 도승지, 대사간, 대사헌 등을 지냈습니다.
공주와 동복오씨의 인연은 오백령 선생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은 임진왜란 중인 1593~1594년에 분조를 이끌던 광해군을 공주로 호종하였으며 인조 2년(1624)에 일어난 이괄의 난으로 인해 인조가 공주로 파천할 때도 인조를 호종하였습니다. 광해군을 호종한 공으로 위성공신 3등에 책록되었고 인조를 호종한 공으로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습니다.
이후 작은아들 오단(吳端)에 이어 증손인 오시대(吳始大)까지 25년 동안 3대에 걸쳐 직계비속 4명이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공주에 부임함으로써 동복오씨는 공주와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묵재공영각중수기*에 따르면 본래 선생의 영정은 황해도 배천의 문회서원에 형 오억령과 함께 봉안되었으나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이 훼철되자 후손들이 단지리 월굴마을로 사우를 중수하여 이전하였습니다. 당호는 오백령의 당호를 따라 휴복영당이라 했으나 사우가 오래되어 2004년에 영당을 새로 건립하면서 ‘묵재영당’으로 고쳤습니다. * 묵재공영각중수기 : 1928년 후손 오인영(吳麟泳, 1844~?)이 쓴 것으로 오백령의 영정이 봉안되는 과정과 중수사실을 적은 기록
공주시는 조선 중기 공주와 인연을 맺었던 오백령 선생의 삶을 기리기 위해 2023년 12월의 인물로 선정하였습니다.
카드뉴스
동복오씨와 공주의 인연이 시작되다 묵재 오백령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는 광해군을, 이괄의 난 때는 인조를 호종하여 공주에 왔던 인물로 이후 동복오씨가 공주와 인연을 맺게 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본관은 동복, 자는 덕구, 호는 묵재로 2021년 12월 공주역사 인물인 오시수의 증조이다
강직하고 근후한 성품으로 선조 27년(1594)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중앙관서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론으로 인해 파직당했다가 인조 즉위 후 형조참판으로 기용되어 이후 도승지, 대사간, 예조참판, 대사헌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공주로 호종하여 위성공신 3등에 입록되고 복천군으로 봉군되었다. 또한 1624년 이괄의 난 때도 인조를 공주로 호종하였으며 후일 여으이정에 추증되었다.
우성면 단지리 월굴마을에는 오백령의 영정을 봉안한 묵재 영당이 있으며 손자 오정원과 증손 오시수의 묘소가 위치하고 있다.